디자인에 있어 최고의 레벨은 사용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사용자들의 불편 불만을 듣고 개선안을 만드는 것은 쉽다. 어느 정도의 정답이 존재한다. 어려운 것은 새로운 행동 모델을 설정하고 사용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가치가 사용자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비추이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갈린다. 그 제품을 씀으로써 내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지, 삶이 얼마나 더 편리해질 수 있을지 확신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포장'에 있어 애플만큼 노련한 기업은 찾기 어렵다.
아이팟은 클릭휠이라는 인터페이스로 MP3 플레이어계를 평정했다. 클릭휠은 마이너스의 예술이다. 덕분에 타사 모델들에 비해 기능적 제약이 많다. 아이팟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얘기했다. 이런 기능도 안 되고 저런 기능도 안 되기 때문에 예쁘기는 하지만 잘 팔리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예뻐서 팔렸다. 기능적 한계도 문제가 되지 못했다. 대다수의 사용자들이 원하는 기능은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이팟 셔플도 마찬가지다. 액정도 없고 선곡도 못하는 저 따위 제품을 누가 사겠어 하는 비아냥이 있었지만, 셔플 역시 잘 팔리고 있다. 그런 수준의 기능만을 요하는 제품이 시장에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MP3를 앨범별로 가수별로 선곡해서 듣는 것은 아니다. 나만 해도 그렇다. 나도 아이팟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셔플 기능으로만 음악을 듣는다. 내가 게을러서일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도 게으르다.
애플은 사용자들이 원하는 니즈를 제한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한다. 덕분에 심플해질 수 있고, 예뻐질 수 있다. 기능이 적다보니 조작도 쉽다. 구차한 것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니 삶이 윤택해진 느낌이다.
사용자들을 일깨워 고차원의 사용 행태로 이끌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한다. '당신은 지금 너무 미련하게 살고 있어. 이 제품을 이용하면 더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살 수 있을꺼야' 라는 메시지는 두꺼운 매뉴얼과 도무지 알 수 없는 조작 방법으로 사용자를 협박한다. 그리고 시장에서 곧 잊혀진다.
애플도 사용자에게 자신들의 컨셉을 강요하는 부분이 있다. 아니 많다. 하지만 애플은 학습과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기능의 제거를 통해 오히려 더 쉽고 단순한 방향으로의 삶을 제시한다. 이번에 나온 맥북에어도 그런 부분에 있어 매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출시되면 바로 살 예정이다. 가격의 압박은 상당하지만 기능적인 부족함은 눈에 띄지 않는다.
CD롬이 없어서 불편하다? 포맷하고 프로그램들을 전부 다시 까는 게 아니라면 CD롬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쓰는 것 같다. 요즘은 네트웍으로 다 주고 받는데 뭘. CD롬 없애서 얇아질 수 있다면 난 찬성이다.
USB 포트? 마우스만 꽂으면 된다. 다른 걸 꽂을 땐 마우스 잠깐 빼고 쓰지 뭐. IEEE 뭐니 하는 포트들, 이제껏 한 번도 써본 적 없다. 컴퓨터에 마이크를 연결해 본 적도 없다. AV 단자로 비디오 오디오를 빼서 TV로 본 적도 없다.
여분의 배터리를 가지고 다닌 적도 없고 배터리 수명이 다 되어 추가 구입해 본 적도 없다(배터리보다 노트북이 먼저 수명을 다하더라). 배터리가 분리형이 아니라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드 용량이 작은 건 조금 걸리지만, 대용량 파일들은 외장 하드로 관리하면 오케이.
이렇게 써놓으면 내가 되게 멍청하게 컴퓨터를 쓰는 것 같지만,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쓰고 있을 것이다. 내 친구들, 내 가족들은 나보다 더 단순하게 컴퓨터를 쓰고 있다. 그들이 쓰는 기능은 정말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애플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시장에 접근하는 방법을 높이 살 뿐이다. 얼마나 제품을, 제품을 쓰는 사용자들을 잘 포장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기능적 우월함을 내세우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기능,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Lipio


